헌혈버스로 오르는 중년의 남성. 어딘가 동작이 느리고 부자연스럽다.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눕고, 이내 헌혈을 시작했다. 다소 어렵게 헌혈의 숭고한 기쁨을 체험한 이는 1급 시각장애인인 김진호(56) 울산시시각장애인복지관장. 주사바늘이 따끔했을 법도 한데, 김 관장의 표정에는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김 관장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헌혈을 한다. 제 몸에서 나온 혈액을 볼 수는 없지만, 직접 만져보니 기분이 묘하다. 내 몸의 피로 남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경험은 분명 숭고하고 신성하다”고 생경한 경험의 소감을 밝혔다.
22일 오전 김 관장을 비롯해 시각장애인과 복지관 직원 등 12명은 복지관을 방문한 헌혈버스에서 단체로 헌혈을 했다. 복지관 퇴직 직원이 백혈병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박길환 울산시시각장애인복지연합회장이 “헌혈증을 모아 돕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20여명이 동참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헌혈이 가능한 머릿수는 절반정도로 줄었다.
이날 작은 해프닝도 있었다. 울산혈액원 측에서 시각장애인의 헌혈 자제를 권유하면서, 일부 장애인들이 “헌혈을 하게 해달라”고 항의하는 풍경이 벌어진 것. 시각장애인들에 따르면 ‘헌혈 후 빈혈을 느껴 다칠 수 있다’거나 ‘헌혈 전 주의사항을 정확히 숙지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시각장애인의 헌혈을 꺼리는 일이 많다. 김 관장이 그전 여러 차례 시도에도 헌혈에 실패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김 관장은 “시각장애인을 너무 배려해서인지, 너무 조심스러운 듯하다”며 농담을 건넨 뒤, “앞을 보는 것이 불편할 뿐,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시각장애인도 거뜬히 해낼 수 있다는 인식을 가져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3개월 후 두번째 헌혈을 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헌혈버스를 나섰다. 허광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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